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야마모토 이소로쿠 (문단 편집) ==== 그의 죽음과 후일담들 ==== 야마모토 사살 이후 미군 내에서는 전공을 두고 지리한 논쟁이 이어졌다. 시작은 G4M 공격조의 일원이었던 토마스 랜피어였다. 그는 귀환 직후부터 자신이 야마모토를 죽였다며 떠들었다. 상술한 바와 같이 이 작전은 극비였기 때문에 현장 지휘관 존 미첼과 공격조의 렉스 바버를 비롯한 특별 공격 대원들은 이러한 그의 행동에 크게 당황해했고, [[윌리엄 홀시]] 제독을 비롯한 미군 지휘부는 전공과는 별개로 기밀 사항의 누설에 대해 크게 분노하였다 한다. 어찌 되었던 공격대의 일원 중 누군가는 야마모토를 처치한 건 확실하였으므로 미군은 공격대 총지휘관 존 미첼, 공격조의 토마스 랜피어, 렉스 바버, 베스비 홈즈에게 해군십자훈장을 수여하였지만[* 사실 이정도 전공이면 명예훈장도 생각해 볼 수 있었으나 기밀 누설 건이 불거지는 바람에 무산되었다. 기밀 누설에 분노한 홀시 제독은 십자훈장마저 취소하고 격을 낮춰 서훈하려고도 했다. 전사한 레이먼드 하인 중위에게는 해군십자훈장, DFC (Distinguished Flying Cross), Air Medal 및 [[퍼플 하트]]가 추서되었다.] 이후로도 논란은 이어졌다. 그 중심에는 토마스 랜피어가 있었다. 랜피어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신이 야마모토를 죽였다고 주장하였다. [[http://www.joysf.com/3082979|리더스 다이제스트에 토마스 랜피어가 기고한 수기]] 법정까지 갈 정도로 논쟁이 이어지자 1984년에 야마모토 격추의 진상 규명을 위한 위원회가 설립되어 본격적인 [[교차검증]]에 나선다. 그 와중에 토마스 랜피어는 1985년에, 작전 당시 전체 지휘를 맡았던 존 미첼이 1994년에 죽었다. 미군은 랜피어 사후에 야마모토 격추의 전공을 렉스 바버와 토마스 랜피어의 공동 격추로 기록하여 논란을 봉합하려는 모양새를 취했다. 그러나, 진상 규명 위원회는 두 당사자의 주장 및 관련 기록들, 격추당한 G4M에 대한 현장 조사, 야마모토에 대한 부검 보고서, 작전 당시 일본군 호위기 조종사의 증언 등 조금이라도 관련 있다 싶은 모든 자료들을 취합하여 교차검증을 하였고, 1997년에 그 결과를 미국 전투기 에이스 협회에 제출하였다. 위원회가 도출한 결과는 '''야마모토를 격추시킨 건 렉스 바버'''라는 것이었다. 렉스 바버는 2001년에 세상을 떠났다. [[https://blog.naver.com/rectek2/10040455703|야마모토 사살 작전의 진행과 이후 논쟁 및 교차검증 과정에 대한 이야기]] 야마모토의 사망 시기와 관련해서 일본군의 공식 발표는 총격 직후 전사였다. 이 발표를 곧이 곧대로 믿자면 격추 이후 하루가 지난 뒤에 발견된 시신 상태는 여러모로 끔찍했을 것이다. 전투기의 총격을 그대로 받았다면 시신은 형체를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손상되었을 것이며, 설령 총상이 아닌 파편상이라 해도 덥고 습한 열대지역에서 시신은 금방 부패된다. 그러나, 일본군 수색대를 지휘한 하마스나 육군 소위의 발견 보고에선 시신에 심각한 손상이 없어서 신원을 바로 확인할 수 있었다고 했으며 구더기가 발견되거나 부패했다는 언급이 없었다. 때문에 일부에선 야마모토 제독이 추락 이후에도 생존한 상태였고, 사망시간은 시신 발견 당일 오전 6시쯤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부건빌 현지에서 최초로 시신을 부검했던 현지 군의관 나나가와 육군 중위는 시신엔 턱 외상이나 구강 내 출혈이 없고, 사망 원인을 전신타박상 또는 내장 출혈로 인한 쇼크사라고 기록했으며, 야마모토는 당초 생존해 있었으나 상술한 이유로 인해 19일 새벽쯤 사망했다고 결론을 내렸다. 이 때문에 야마모토의 죽음을 각색하기 위해 최초 부검 이후에 시신을 일부러 훼손했다는 의혹도 있다. 군의 수장이 아군 지역에서 적군의 기습을 받아 사망했다는 것 만으로도 문책감인데, 사정이 어찌되었건 간에 발견이 늦어져서 살릴 수도 있었던 사람을 못 살렸다는 얘기마저 나돈다면 해당 지역의 방어를 담당한 자들의 입장에서는 여러 모로 추궁당하기 좋은 일이기 때문이다. 특히나, 자군의 패전, 졸전에 대해 은폐, 기만, 책임 떠넘기기가 만연했던 당시 일본군에게는 더더욱 치명적인 일이었을 것이다. 야마모토 사후 그의 시신이 안치된 전함 무사시의 빈소에서 와타나베 대좌(아마 상술된 함대 참모로 보임.)라는 자는 "탑승객들은 장관을 보호하기 위해 기내에서 스스로 방패가 되었다. 장관은 무사히 탈출했으나 포로가 되는 것이 두려워 권총으로 자결했다." 라고 말했다는 얘기가 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야마모토 사망 직후 현지 부대 내지 관할군 차원에서 그의 죽음을 각색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던 걸로 보인다. 이와 관련하여 야마모토의 사망에 연루된 자들에 대한 입막음이 있었다는 의혹도 있다. [[미드웨이 해전]] 당시 일본군은 패전 소식을 숨기기 위해, 살아 돌아온 항모기동부대원들을 외부와 차단한 채 격리, 연금시키고 대다수는 일선의 총알받이로 보낸 전력이 있다. 야마모토 사망이 미드웨이에 버금가는 충격적인 일임을 감안하면 이 의혹 또한 설득력을 가진다. 야마모토 호위를 맡았던 6인의 전투기 조종사들은 사건 이후 호위 임무에 실패한 책임을 지고자 최일선 비행장으로 자진해서 갔다고 알려졌다. 그러나, 실상은 자원을 가장한 강제 전출 또는 일선으로의 자원하도록 분위기를 조성했을 가능성도 있다.[* 참고로, 위키백과에서는 이 사건 이후 해당 조종사들에 대한 직접적인 불이익은 없었던 걸로 기재되어 있다.] 실제로 이들 중 4명은 이 사건 이후 3개월 이내에 전사하였고, 다른 1명은 1943년 중 계속 이어진 솔로몬 제도에서의 항공전 와중에 전신에 큰 화상을 입었다[* 이 사람은 [[사카이 사부로]]와 사이가 안 좋았던 걸로도 잘 알려진 일본군 에이스 스기타 쇼이치였다. 그는 솔로몬 제도에서는 살아 돌아와서 전쟁 말기엔 [[343 해군항공대]]의 일원이 되기도 했으나 결국 1945년 4월에 전사한다.]. 종전때까지 살아남은 유일한 1명 또한 1943년의 격전중에 오른손을 잃었다.[* 이 사람은 야마모토 호위기의 조종사로서는 유일하게 상술한 진상 규명 위원회 활동 당시까지 생존하여 야마모토의 피격 상황을 증언하였던 겐지 야나기아이다. 그는 야마모토의 피격 상황을 증언하면서 자신이 하인 중위를 격추했다고 주장하였다.] 하마스나 소위 및 그 휘하 수색 인원들도 최전선에 배치되어 하마스나 소위를 제외한 나머지 전원이 전쟁중 전사했다. 최초 부검의인 니나가와 중위 역시 일선에 계속 있다가 전쟁 후반기에 전사하였다. 하마스나 소위의 경우, 야마모토 추락 지점 발견의 공으로 일본 본토로 전출되어서 살아남았다는 얘기가 있다. 하지만, 이 의혹이 진짜라면 실상은 좀 더 복잡할 수도 있다. 그러나, [[비스마르크해 해전]] 항목의 후반부에 언급된 내용을 보면 알겠지만, 야마모토 사후 2달을 갓 넘긴 1943년 6월 하순부터 미군이 본격적인 공세에 나서서 11월 초에 이르면 야마모토가 시찰을 갔던 부건빌 섬에 미군이 들이닥치고, 미처 해를 넘기기도 전인 12월 말에 이르면 [[글로스터 곶 전투|야마모토가 출발했던 라바울 코앞까지 미군이 육박]]했을 정도로 전황이 급격하게 악화되었기 때문에 굳이 강제 전출이 아니래도 남태평양 전선에 있던 이들의 운명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미군에 의해 사살될 당시, 야마모토 제독은 함정 및 육상 모두에서 범용으로 착용할 수 있도록 채택된 최신 [[녹색]] [[전투복]]인 사관용 '3종 군장'([[http://blogimg.goo.ne.jp/user_image/03/b7/52e4c75b9bed30978cb5aa1ac526cae5.jpg|#]])을 생애 처음으로 입고 갔다. 원래는 평소처럼 해군의 흰색 하정복인 사관용 '2종 군장'([[http://blogimg.goo.ne.jp/user_image/1f/2f/d026f57d74aa3ecc1710efed5f5d3c12.jpg|#]])을 입고 있었지만, 육군 장병들을 만날 예정이라 [[일본군의 육해군 대립|육/해군이 동질감을 느낄만한]] 녹색 군복을 입는 게 좋겠다는 의견을 받아들여 참모들과 함께 3종으로 갈아입고 비행기에 탔던 것이다. 이 때문에 한동안 해군에선 3종 군장이 재수없는 옷으로 통했다는 야사가 있다. 참고로 야마모토 이소로쿠의 죽음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한 군의 실질적인 수장이 전사한 유일한 사례다. 물론 연합함대 사령관이 명목상으로는 해군성과 군령부의 지휘를 받는 형태지만 사실상 일본 해군이나 다름없는 위상을 가지고 있으니 실질적 수장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물론 장성급 지휘관이 항공기 등으로 이동하던 도중 공격받아서 사망한 사례는 좀 있는 편이긴 하지만 야마모토만큼 권한을 가진 사례가 없기는 하다.[* 지프를 타고 이동하다 공격받아 전사한 미 3기갑사단장 모리스 로즈 소장, 브리스톨 봄베이를 타고 이동하던 도중 독일 공군에게 공격받아 사망한 윌리엄 고트 중장, 타고 있던 [[Fi 156]]이 소련군에게 격추당한 [[테오도어 아이케]] SS대장 등이 있다.] 1944년 6월 20일 미국 부통령 헨리 아거드 월레스가 [[장제스]]와의 회담을 위해 충칭을 극비 방문하자 일본군 제5 항공군 사령관 시모야마 다쿠마 중장은 야마모토의 복수를 위해 월레스가 탑승한 비행기를 격추코자 하였다. 지나 파견군 총사령부가 입수한 월레스의 스케줄을 바탕으로 작전을 세웠으나 작전 당일 정찰기가 월레스의 탑승기를 찾지 못해 결국 작전은 중단된다. 전후 지나 파견군 총사령부가 입수한 월레스의 스케줄 자체가 거짓이었음이 밝혀졌다. 야마모토의 비행 일정을 해독한 암호해독반의 일원 중 한 사람인 존 폴 스티븐스 해군 소령은 훗날 미 연방 대법원의 대법관이 되었다. 그는 전후 암호 해독의 공로로 동성훈장을 수여받는다. 훗날 스티븐스 대법관은 야마모토 제독을 죽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건 맞지만 정작 야마모토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땐 썩 유쾌해하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왜냐하면 아무리 적장이라지만 잠시나마 미국에서 살고 미국인 친구들을 만든 사람에게 일말의 재고도 없이 사살을 명령한 상부에 회의감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이 경험은 그가 훗날 법관으로 재직할 때 사형을 최대한 줄이는 판결을 하는데 영향을 주었다. 그는 2010년에 대법관을 사직한 뒤 2019년 타계할 때까지 사형을 목소리내어 반대하는 법조인 중 하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